81년도의 일기는 1월과 2월 그리고 3월과 8월의 몇 장을 제외 하고는 한권이 대부분 공백 상태로 남았다.
아마 하루하루 살아가는데 너무 바빠 일기 쓸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는 아니었을까?
1학년 때 연풍에서 유학 온 25번인 춘순과 주번을 하면서 9반의 미자와 친해져 학생회관에서 공부도 하고 난생 처음으로 헌혈도 해보고 하던 기억들.
27번 형순인 조용필 열혈 팬으로 조용필 브로마이드와 책받침, 책갈피를 수없이 갖고 있고 청주에 콘서트가 있는 날이면 어김없이 어떻게든 빠져나가 공연을 보고 와서 자랑이 넘쳐났다.
같은 반에 펜싱부와 양궁부 기체체조, 농구 선수가 있어 수업 시간이면 서너 명은 항시 빠지는 상황.
그중 가끔 날라리들은 자습시간에 빠져나가 목욕탕에 갔다가 종례 후에나 들어오는 애들도 있었고.
1학기까지만 해도 청주의 중심에 있는 상당공원에 있다가 방학 후 2학기부터 율량동에 신축교사로 이사해 수업을 하면서 시작된 가방 자율화.
방음 방한장치가 2중창으로 되어있어 한겨울에도 난로 한번 때지 않고도 따뜻하게 보냈던 시절. 지금처럼 각 개인별 사물함이 있어서 등하교시에는 집에서 예, 복습할거나 숙제할 교과서만 갖고 다니고 대부분 사물함을 이용하여 가방 자율화로 보조 가방만 갖고 다니니 혹은 우릴 부러워하는가 하면 우릴 날라리라고 놀리는 이들도 있었던 시절.
겨울이 따뜻하기도 했지만 여름이 또한 시원하기도 해서 3힉년 여름 방학 때 중앙여고 다니는 천숙이가 우리학교에서 같이 공부하기도 했다.
집에는 아파트를 제외하곤 아직도 푸세식이 대부분일 때 학교는 지금처럼 각 층별대로 수세식을 사용하여 교실에선 실내화 대신 덧버선을 신으나 화장실에서만 슬리퍼를 신었던 시절. 휠체어나 목발 짚는 학생을 생각하여 계단 대신 매트식으로 오르내릴 수 있게 배려한 시설.
점심 도시락은 대부분 2~3교시 마치고 까먹고 점심시간엔 구내식당 가서 점심을 사먹거나 간식을 사 먹던 시절. 그 당시 가장 즐겨 먹던 쫄면 350원.
개별로 가면 700원인데 시험(중간, 기말, 월말, 모의고사 등 그땐 뭔 시험이 그리 많았던지)만 끝나면 항상 단체로 관람했던 영화가 400원이던 시절.
친구 만날 땐 음악다방에 가고 좀 논다는 애들이 주로 가던 롤러 스케이트장이 성행하던 시절. 그 곳이 연애 장소라 하여 출입금지 한 적도 있지만 한때는 대회까지 주체한 적도 있었다.
어느 학교든 예술제를 할 때면 예술문화회관에서 했고, 시화전이 있다하면 학생회관이고 예술문화회관이고 창순이와 꼭꼭 빼놓지 않고 손잡고 가서 보던 시절.
글쓰기 지도를 받아 잘 써보고 싶은 욕심에 문예반에 가입하여 원하던 대로 창순이는 만났지만 담당 선생님이 지도보다는 과제를 내주고 써 온 학생들의 글을 평가하는 정도라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시는 나의 취약한 점이 되어 감히 손도 못 대다보니 아무 성과 없이 결국 시간만 허비하는 결과가 되어버렸다.
시는 어떻게 어떻게 쓰는 것이라든지 이렇게 저렇게 써보라든지 하는 그런 지도는 단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결국 문예반은 나처럼 글을 잘 써보기 위해 배우러 가입한 CA가 아니라 창순이나 학미처럼 이미 잘 쓰는 애들이 가입하여 대회 안내 받고 대회 준비하는 곳이란 걸 너무 늦게 알아서 2년을 허망하게 절망하며 보내던 시절이기도 했다.
하지만 학교 도서관에서 도서 대출을 통해 3년 동안 원없이 책을 읽기도 했다.
중학교 때 일림이 때문에 도장을 파게 된 이후로 별로 쓸 일이 없다가 고등학교 때 2학년 수학 여행 갈 때와 3학년 원서 쓸 때는 쉬는 시간 반납하는 것도 부족하여 수업시간에도 책상 밑으로 수많은 친구들에게 분필로 도장을 파주었던 기억도 새롭다. 그것을 바탕으로 창원에서 가게 할 때 1회용 도장으로 부수입을 많이 올리기도 했다.
그리고 YMCA는 마산에서만 해도 그 활동이 활발한데다 아주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어서 가입하여 활동하려던 서클이었는데 몇 번 참석해보니 청주에서는 그 이미지가 아주 좋지 못했다. 그곳이야말로 날라리들? 이 모이는 곳, 연애하는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언니 말대로 탈퇴하였다.
속초의 영식과는 지속적으로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무슨 사정인지 자퇴를 하고 검정고시로 대학을 준비하였다. 그 후로도 조금 더 지속되다가 어느 시점에 어떻게 끊겼는지 끊어졌다. 아마 내가 이사하는 바람에 연락처가 변경되어서일 수도 있겠다. 난 졸업 다음 날 창원으로 갔으니까.
현철과도 만난 이후 편지를 지속적으로 주고받고 2학년 봄 방학 때 그의 집에 방문 했다가 어린 은행나무를 받아오기도 했다. ‘우정은 빨리 자라는 나무가 아니다’라는 말과 함께. 그 후에도 계속 편지를 주고받고 삼사관 학교까지 면회를 가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너무 갑갑하고 도저히 나랑은 맞지 않는 것 같아 정리를 하였다.
중학교 때와 다른 것은 소풍 대신 행군이었다. 교련복 복장에 교련 가방메고 긴 거리를 걸어갔다 오는 일.
체육시간은 세 가지를 합쳐서 했다. 다시 말하면 세 교과를 쪼개서 짜야 하는 것이었다.
일반 체육, 무용, 교련이 그것인데 무용시간엔 현대무용, 고전무용 말고도 발레 등 여러 가지 민속무용도 곁들였다. 실기와 필기로. 교련 시간엔 응급처치라든지 화생방전이라든지...
과학도 화학, 생물 등으로 갈리고 사회도 국사, 세계사, 인문지리, 국토지리 등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제 2외국어로 일어도 배웠다. 한문도 국어 속에 속한 게 아니라 따로 과목으로 추가되었다.
1학년 2학기 때 가방 자율화를 시작으로 2학년 때 두발 자유화가 되었다. 그리고 3학년이 되면서 교복 자율화가 되었다. 교사 이전을 하면서 우리학교가 자율화의 선봉에 서 있었다.
다른 학교는 3학년 때 교복 자율화 되면서 두발 자유화 한 학교가 대부분이고 그나마 가방 자율화는 실행하지 않은 학교가 많았으니까.
타 학교는 1학년 때부터 7시 8시까지 자율학습을 하였는데 우린 정규 수업만 마치면 끝났기 때문에 하교 할 때면 실업계 학생들 밖에 없었다.
평일도 내가 좋아하던 민이를 보려고 초정차를 잘 타고 다녔고 토요일이면 일부러 시간 맞춰 타느라 3년 가까이 함께 타고 다닌 적이 많았다. 물론 그 친구는 모르는 일이었겠지만.
중 3 때부터 고 3 내내 국어 선생님이 담임이셨다.
그래서 내가 제일 잘했던 과목은 국어였고 일어, 한문, 고전, 화학, 생물, 국토지리 등은 80~90점대를 유지할 만큼 잘한 과목이었다.
'1981년 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8월-추억 이야기 (0) | 2012.12.08 |
---|---|
3월-여고생이 되어서 (0) | 2012.12.08 |
3월-입학 전 (0) | 2012.12.08 |
2월-중학교 졸업 후 이야기 (0) | 2012.12.07 |
겨울방학-2월의 이야기 (0) | 2012.12.0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