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일기

2월-중학교 졸업 후 이야기

순례 2012. 12. 7. 22:31

2월 9일 월

개학날이다.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들을 만나고 선생님과의 인사와 대화도 오갔다.

제설작업을 2교시부터 하느라 집에 와서 삽을 가져가야했다.

삽을 가져다 눈을 떠서 담고 모으는 등 열심히 하고 있을 때 담임선생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셔서는 “방학 내내 언니 집에 있었어?” 하셨다.

난 언니라는 말에 아무 말도 안했지만 ‘아마도 내가 보낸 편지를 받아보고 말씀을 하시나보다’ 생각했다.

제설작업하고 4교시를 계속했다.

그리고 점심을 고스란히 넘기고 5교시, 6교시까지 몽땅하고 청소하고 종례하고야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올 때 미수가 「유리의 성」을 보여 달라기에 미수 이하 복순, 옥수, 낙기 등 다섯이서 함께 집에 왔다.

집에 도착해보니 마루에 편지 한통이 놓여 있었다. 짐작했듯이 강원도에서 온 편지였다.

허겁지겁 감춰가며 웃으며 읽어 내려가니까 친구들이 자꾸만 웃으며 무슨 편지냐고 했다.

그래 친구라니까 여자냐, 남자냐 또 따졌다. 해서 “얘 이름이 울 엄마 이름하고 같아” 하니까 또 묻는다.

저번까지만 해도 ‘친구에게’ 또는 ‘your pen friend youngsik’ 이라고 쓰던 말을 대신에 ‘순례에게’ ‘순례의 친구 영식이가’란 말을 넣었다.

갑자기 쓴 말이라 그런지 좀 기분이 안 좋다.

 

2월 16일 월

아침부터 서둘러 집을 나섰다.

나서다 생각해보니 통지서를 안 갖고 나와 다시 돌아와 통지서를 갖고 미숙이와 함께 차를 타려는데 영희가 와서 우린 셋이 차에 올랐다.

셋이 나란히 뒷좌석에 앉아 갔다. 81년도 후기 인문계 추첨으로 인해 청주로 가는 것이다.

주성중학교에서 9시~12시까지 여자, 1시 반~3시반 까지 남자들의 추첨이 있었다.

퍽 오랜 시간을 기다려서야 겨우 강당으로 들어갔고 또 거기서도 좀 기다려서 추첨한 번호가 1번이었다.

우리 반에서 9명 중 미정이와 창순이도 같은 1번이다.

과연 어느 학교일까? 자못 궁금하다.

그러나 우물에서 숭늉 찾는다고 될 일이 아니잖은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천천히 걸어 청여상까지 갔다. 쉬는 시간에 언니와 잠깐 얘기하고 점심때까지 기다려 같이 점심 먹고 돌아왔다.

오다가 에덴 의상실에 들려 옷을 맞추고 집으로 돌아왔다.

착잡한 마음을 안고 4시에 발표를 들었다.

남학생 먼저 발표하고 여학생 발표하는데 처음에 ‘청주여고 1번, 5번’ 했다. 기분이 무감각했다.

지금에 이르러서야 청주여고 된 것이 다행이었다.

아침쌀을 일어놓으려고 밖에 나가보니 며칠 전부터 오려던 비가 시원하게 내리고 있었다.

 

2월 17일 화

언니가 요새 유행하는 방콕 A형이라나? 하여튼 독감에 걸려 결석 사유를 같은 학교 애한테 갖다 주라 시키고 누워 있어 언니의 점심을 준비하느라 부엌에서 밥을 끓이고 있을 때였다.

우체부 아저씨 목소리가 들렸다. 몇 명 묻는 소리 나더니 내 이름이 불리워졌다.

내 이름 부르기가 바쁘게 기다렸다는 듯이 부엌문을 박차고 나가 소리개가 먹을 것 낚아채듯 우체부의 손에서 편지를 받아들었다.

꼭 그가 온 것처럼 반가웠다. 뭐라고 썼을까. 온다고 할까, 온다면 언제쯤?

이런 생각으로 언제나처럼 조심스럽게 봉투를 뜯었다. 온다는 말은 없고 여름쯤이면 어떻겠냐는 말만이 적혀 있을 뿐. 그리고 내가 지은 시가 보고 싶다는 말도.

그런데 겉봉을 보니 여지껏 꼬박꼬박 쓰던 상대방 주소대신 ‘영식 씀’만이 있을 뿐이고 이쪽 주소도 희한하게 듣도 보도 못한 주소가 적혀 있잖은가.

네 번씩이나 썼으면서 주소도 제대로 몰라 틀리게 쓴담.

비록 기쁜 맘은 아닐지라도 남에게 온 편지 묵히는 내가 아닌지라 윗방에 올라가 펜을 잡았다.

한참 열 올리며 쓰고 있는데 정숙이가 들어오고 이어 승섭이와 지섭이가 들어왔다.

편지 쓰는 중이니까 좀 나가라니까 가란다고 가버린다.

밉다. 미웁다. 그렇게 미울 수가 없다. 사촌인데도 불과하고 왜 그리 미운지. 도시 이해가 안 간다. 다른 애들은 사촌이면 참 친하게 재미있게 지내던데. 내 못난 탓이지.

편지를 부치고 왔다.

나이도 한 살 더 먹고 했으니 사촌들도 이해해주고 깊은 이해심과 사랑으로 화목하게 지내야지.

 

2월 18일 수

아침에 가족들의 빨래를 빨고 나니 힘이 쭉 빠졌다.

점심을 먹고 나서는 대청소하기로 했다.

해서 우선 안방의 책꽂이부터 치웠다.

뒤죽박죽 놓여 있는 책들을 깨끗하게 정돈하고 TV 밑이며 장롱 밑이며 말끔히 쓸어 안방은 정결하게 해놓았다.

그다음 책꽂이에서 나온 지저분한 것이며 다 쓴 노트 등을 윗방으로 가져가 미싱 서랍에 다 집어넣어 놓고 휴지할 건 마루에 내다 놓는 등 윗방도 싹 다 정리하고 치우니 어느 정도 깨끗해 뵈었다.

조금이라도 지저분하거나 정리해 놓은 것과 틀리게 되면 치우던가 또 바로 정돈했다.

오곡밥을 먹는다는 날인데도 고사하고 일찍도 못 먹었다.

아버지가 충남 가시고 안 계신 바람에 반찬도 특별히 장만한 것도 없을뿐더러 먹고싶은 맘도 없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시루떡을 해서 집안에 다 돌리고 순우네 집에 심부름 갔다. 그 집에서 좀 있다 오는 길에 모퉁이를 돌아오는데 웬 남학생 셋이 내려오고 있었다.

가까워졌을 때 보니까 맨 가에 흥기라는 걸 알았다. 지나쳐 오는데 마스크 한 학생이 “떡 좀 줄래?”하길래 “누군데?”했다. 그러자“나여”하길래 그 애가 동네 앤 줄만 알고 “나가 누군데?”하자 “나, 흥기 친구여”한다.

그 바람에 놀란 우리는 아무런 대꾸도 또 뒤도 안돌아보고 우리들끼리 얘기하며 내려오는데 멀리서 따라온다. 막 뛰었다.

뜨락에서 숨을 돌리며 있자 대문 밖에 어슬렁거리고 있다.

방에서 얼마 앉았다가 순우를 바래다준다고 나갔을 땐 아무도 없이 조용했다.

요샌 어쩐지 놀라는 일이 많이 벌어지는 것 같다.

졸업 했다고 지들이 다 큰 줄 아니? 쬐꼬만 것들이.

 

2월 19일 목

친구들이 온다기에 어제부터 그들 맞을 준비를 했다.

오늘도 눈에 거슬리는 것들을 사정없이 치워버렸다.

몇 번씩이나 대문 밖에 -할 일도 없이- 왔다 갔다 했다.

혹시나 은영의 편지나 사람이라도 오기만을 초조히 기다리며 은경이들을 기다렸다.

앞집 은영이네 집에 어제 한 떡을 갖고 갔더니 마침 은영이 혼자라서 이야기 하다 흥기의 앨범을 보았다.

그 속에는 그의 사진은 별로 없고 친구들 사진이 대부분이었는데 그 중 일상의 사진도 있었다. 은영은 잠자코 내 옆에서 웃을 뿐.

오후가 지나면 바로 오려나 목을 빼고 기다려도 오지 않는다.

급기야는 화가 나고 말았다. 오기만 와봐라. 가만 안둘 테니.

저녁을 먹기 시작해도 아무런 소식이 없다. 신경질 나고 거의 모든 신경과 두 귀는 밖으로 열려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순례야!”하는 용숙의 목소리. 얼마나 기다렸던 부름이었던가. 대답과 동시 방문을 열고 나갔다.

처음엔 화를 냈지만 와 준데 대한 반가움에 반갑게 맞이했다.

은경이, 용숙이, 순희 셋이었다.

용숙과 순희는 다른 애들 데리러 간다고 가고 나와 은경이는 종숙일 불러 놀 준비를 했다.

마침 엄마는 윷놀러 가시고 아버진 충남 가셔서 안 계시고 언니가 동네 애들을 불러 주었다.

9시반 되어 아무도 못 데리고 둘만 들어와서 윗방에서 놀았다.

엄마의 성화와 준비 없는 놀이라 별 재미는 없었지만 중학 3년 동안 말 한마디 대화 없던 우리들이 한 자리에서 놀았다는 의의와 한 페이지의 추억으로 돌린다 생각하니 괜찮다.

여자 다섯에 남자는 흥기, 종인이, 호관이, 경수, 영주, 동건이, 남서 모두 12명이었다.

 

2월 20일 금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와 보니 때 아닌 눈이 내리고 있었다.

주책도 없이 지금 때가 어느 때라고 눈이 다 온담.

눈이 오면서 날씨도 차가워졌다.

아침을 먹고 상을 물려 치우곤 서둘러야 했다.

왜냐면 학교 소집일이라 추첨된 학교 즉, 입학 할 학교에 9시 반까지 가야 되는데 9시가 다돼가기 때문이다.

9시 5분인가 되어 넷(은경,순희,용숙,나)이 집을 나섰다.

학생사까지 초조히 걷다가 셋을 뒤로 남기고 급한 나 혼자 빠져 뛰다시피 거리를 걸었다.

버스 타는 곳에 가보니 어느 고등학교 남학생 혼자만이 찬바람에 떨며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를 둘이 눈을 맞으며 차를 기다리자니 6학년 때 우리반 이었던 윤석이가 엄마와 함께 우산을 쓰고 나왔다.

그리고 현승이와 종인이가 오고 순분이와 종혜가 왔다. 9시 15분 이라고 했다.

마음은 점점 조급했다. 그러나 차를 타고 갈 때에는 초조한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그 속에는 우리학교 학생은 아니지만 소집일에 참석코자 하는 이름모를 학생들이 퍽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상당공원 앞에서 내려 청주여고 교문을 막 들어서자 창순이와 종명이가 반갑게 맞았다.

종명이가 저와 내가 10실 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10실이 붙어 있는 곳에 가보니 종명이 다음 다음번에 내 이름이 있었다. 창순인 3실이란다.

곧이어 강당으로 들어가 여러 가지 얘기를 듣고 주의 사항 등을 듣고 각 반으로 들어갔다.

도서거실에서 임시 담임을 모시고 간단한 면접을 보았다.

입학은 3월 4일 오전 10시이고 반 편성도 새로 하여 그날 써놓는다는데 창순이와 제발 한반이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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