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5일 토
여기는 지금 전혀 생각지도 않았던 곳 화순.
광주시에서 변두리로 떨어진 화순읍에 자리 잡은 집이다.
참 인연이란 묘한 것이다. 8월 2일 밤에 알게 되어 낯설은 곳까지 오게 되다니.
어제의 일이었다.
우리가 띄운 엽서에 따라 목포역으로 마중 나와 주었다. 세 명이서.
한참 엎치락뒤치락 하다가 겨우 허락을 했다. 그들 말에 따르기로. 그래서 계속 그들을 따라 갔다.
목포 광주간 직행 버스를 타고 왔는데 자리가 모자랐다. 그래서 언니와 현철, 그리고 나 셋이서 앉고 정연과 문기는 섰다.
밝은 보름달이 산마루 위에 들판과 산들을 밝게 비춰주고 있었다.
얼마를 가다가 나와 문기가 교체하여 일어서서 가다보니 현철도 일어섰다.
일어선 채로 얼마를 더 가다보니 두 사람이 내렸다.
현철과 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눈이 마주치자 자리로 갔다. 내가 창 쪽 현철이 안쪽. 아무 말도 없었다.
그러나 마음의 평화가 온다. 난 본시 남자들과 앉으면, -잘 앉지도 않지만- 몸을 조금이라도 피하려 한다. 그런데 어제는 피하고 싶지 않다.
정연은 그 집으로 가고 우린 문기를 따라 그의 집으로 갔다. 가면서 -버스 타러 갈 때나 버스에서 내려 문기네 집에 갈 때- 도 언니는 문기와 나는 현철과 함께 걸으며 얘기를 했다.
문기네 집에 들어서니까 저녁 먹으러 안가느냐고 그의 누나들이 와서 말을 하고 아버지는 뭐 사다 먹으라고 했나보다. 나가더니 과자, 빵, 음료수 등을 사왔다.
현철 옷 입은 게 불편할 것 같아 문기에게 말하니까 청바지를 주어 입었다.
나도 체육복장으로 갈아입었다. 청바지에 위 교복을 입고 있는걸 보고 있노라니 아무래도 안 되겠기에 뭐 아무거나 갈아입을 걸 좀 주라했더니 체육복을 주었다.
문기. 나와 현철을 보더니 뭔가 통하는 데가 있다고 했다. 위 체육복 색도 비슷하고 바지색도 비슷하니까. 누나들이 냉 콩국 물을 가져왔다.
언니가 떠준 걸 마시고 현철을 떠주자 문기는 ‘누구는 생각해주면서’ 했다. 그래서 ‘거기는 먹고 있길래 그랬다’고 했다.
저녁 먹으러 간다고 문기가 나가버렸을 때 셋이 남았다.
그 자리서 우리 모두 똑같은 A형 이라는 걸 알았다. 문기까지도. A형 성격을 잘 아는지라 가엾기도 하지만 더 마음이 끌리기도 한다.
그리고 보면 볼수록 대하면 대할수록 괜찮아 보이고 좋아 보인다.
내 사진을 언니 수첩에서 꺼내려 할 때 못 꺼내게 하자 꺼낼까말까 말까 하다가 결국은 말아버렸다. 정 꺼낸다면 못 본체 말려니까 똑같은 성격의 소유자 어디 가랴. 마음 약한 건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어젯밤 내가 가장 먼저 잠자리에 들었는데 바로 현철도 잠자리에 든 모양이다. 문기는 언니한테 둘은 닮은 점도 비슷한 점도 많다고 했다.
그리고 버스 안에서 문기한테 들은 거지만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언니가 예쁜데 현철이는 자네가 예쁘다”하더라고. 듣기 싫은 말은 아니었다.
오늘 아침이 지나면 떠나야 한다.
이상히도 오빠라고 하고 싶으면서도 오빠보다는 친구로 하고 싶다. 우정을 나누면서.
8월 16일 일
어제 5시 40분 까지만 해도 여태껏 인연이 없던 광주에 있었다.
아침 문기네 집에서 아침을 먹고 화순을 떠나 광주 시내를 돌아다녔다.
제일 먼저 숭의실고 앞에 내려 학교에 들어가다가 학교 학생들 때문에 나와 버렸다.
그다음 간 곳이 박물관. 박물관에서 돌고 나오는데 다섯 명 중 세 명은 먼저 나오고 나와 현철인 나중 나왔는데 나오더니 자동커피 판매 구에서 커피를 사주었다. 나 혼자한테만. 문기는 웃어버렸다.
이 사람들. 이들을 알게 된 것은 8월 2일 밤 내수에서 조치원 가는 기차 안에서였다.
기차에 올랐을 때 느껴오는 시선을 받다가 자리가 나 옆에 앉은 것이 계기였다. 언니 옆에 앉은 현철은 말이 없었고 문기만 말이 많았는데 그 사람이 점잖아서 말이 없는 줄 알았더니 원래 말 안하던 사람이라 그랬다. 그래서 문기는 언니를 누나로 현철은 나를 동생으로 하기로 한 것이다.
나중 일이지만 분기는 동생이 없고 현철은 동생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왜 누나들이 있는 문기는 누나 삼고 동생 있는 현철은 동생 하냐니까 그냥 웃기만 했다.
중앙 고속버스 터미널에서 3~4시간 기다리는 동안 현철과 나란히 앉아서 말할 때 나는 무한한 안정감과 평화를 얻을 수 있었다. 왜? 왜 그런지 모르겠다.
말없이 앉았어도 그렇게 안정이 있고 안심이 되는지 모르겠다.
이태껏 그런 적은 없었다.
그리고 오빠라고 부르고 싶으면서도 불러지지 않고 또 부르기 나쁘기도 하다.
너무 오랜 시간을 지루함 속에서 기다리다가 막상 떠나와야 할 시간이 되자 미련이 남는다.
8월 23일 일
귀염둥이!
여름날 추억 속에 만난 나의 친구 현철이 붙여준 내 별명이요, 또한 애칭이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체격이 큰 편이다.
그러나 그렇게 큰 체격에 어울리지 않게 친구들로부터 귀엽다는 말을 많이 들어왔다.
그런데 별명이 붙여지긴 처음이다.
아무리 들어도 싫지 않은 말이다.
내가 어째서 귀엽게 느껴졌을까!
나이 탓? 학년? 막내? 아니면 성격? 행동? 모르겠다. 다른 건 다 마음으로 알 수 있는데 어째서 귀염둥이로 하게 됐는지는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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