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복숭아그네

순례 2013. 8. 5. 07:14

나는 복숭아를 좋아한다. 좋아해도 그냥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엄청 좋아한다.

그래서 제철인 여름엔 언제든 먹고 싶은 대로 사 먹다가 철지나 먹고 싶을 땐 대신 통조림이나 음료, 또는 떠먹는 요구르트를 먹기도 한다.

그러다보니 복숭아만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데 올해는 장마가 길어서인지 아직 비싸다보니 사지는 못하고 가격이나 상태만 들여다보고 지나친다.

그러한 내 마음을 간파라도 한 듯 남편이 복숭아 좋아하는 나를 위하여 크고 실한 것으로 몇 개 사왔다.

이맘때면 복숭아를 먹을 때마다 생각나는 어릴 적 추억이 있다.

 

나는 괴산군의 산골에서 태어났다.

내가 살던 고향집은 초가집이었는데 울타리 안에 복숭아나무 한그루가 있었다.

비록 한그루였지만 어찌나 크고 우람하던지 거기서 열리는 열매로 우리가족 모두 풍족히 먹을 만했다. 더구나 울타리 안에 있는 나무는 그 가지가 울타리 밖에까지 뻗쳐 나갔는데 마침 집 뒤는 비탈이어서 울타리 밖은 지나는 길손들이 손쉽게 열매로 배고픔을 달랠 수 있었다. 물론 울타리 안에서는 나무에 올라가야 되고 어렵고 힘들게 따야 했지만 말이다.

그래도 울타리 밖으로 나가 굳이 밖으로 열린 열매를 따지 않았던 것은 안에 열린 것으로도 우리 가족에게 충분하려니와 지나는 이에게 베풀고자 하는 배려와 시골인심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튼 우리에게 복숭아나무는 여름이면 열매를 실컷 먹게 하고 또한 어린 시절을 행복하게 했던 나의 놀이터이기도 하였다.

아버지는 해마다 우리를 위하여 새끼줄을 가늘게 꼰 것을 여러 겹 또 꼬아서 굵은 밧줄을 만들어 복숭아나무에 그네를 매어주셨다. 그리고 나와 언니들은 그곳에서 1년의 대부분을 그네 타며 놀곤 하였다.

특히 언니들 학교 가고나면 나 혼자 심심하곤 하였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께서 그네를 밀어주며 같이 놀아주시던 장면이 어제처럼 또렷하다.

아버지마저 일하러 나가시고 나 혼자 집에 있을 때면 혼자서 그네를 타기도 하였다. 산골이라 친구도 많이 없던 터라 그네가 나의 놀이터요, 나의 친구였던 것이다.

언니들이 학교에서 돌아와도 나보다 크니까 나만큼 그네를 즐겨 타지 않았고 또한 친구들과 놀거나 숙제하거나 그러느라 어차피 그네는 대부분 나의 차지였고 어찌 보면 나만의 그네였고 나를 위한 그네라고도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언니들에겐 엄격한 아버지가 늦둥이라 유난히 나를 사랑하셨고 그네도 곧잘 태워주시며 나와는 자주 놀아주시곤 하셨다.

그보다 훨씬 어렸을 적 나는 7남매의 막내로 태어나다보니 모유가 부족한 모양이었다.

4월에 태어난 내게 부족한 모유대신 이유식을 빨리 시작하였는데 남들처럼 미음을 먹인 것이 아니라 복숭아 과육을 아버지가 먹이셨단다. 껍질을 벗기고 숟가락으로 떠서 입에 넣어주면 그렇게 잘 먹을 수가 없더란다. 쪽쪽 빨아가면서.

그렇게 먹기 시작한 복숭아라 그런지 내 평생토록 제일 좋아하는 과일이 되었다.

물론 나는 너무 어려서 기억도 생각도 없지만 복숭아를 맛있게 먹는 내 모습을 보실 때마다 살아생전에 아버지는 내게 그때의 이야기를 종종 들려주시곤 하셨다.

무릎에 앉혀놓고 숟가락으로 떠주면 입으로 받아 오물오물 먹는 모습이 얼마나 예뻤다든지. 하긴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딸이었으니 무엇인들 예쁘지 않았을까마는 그래서 많이 먹이다보니 내가 좀 통통해진걸 아닐는지.

어쩌면 그래서였을까. 가족 중에 그 누구보다도 나만큼 복숭아를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 후로도 언제나 그네를 타며 여름이면 복숭아를 먹고 놀았던 유년의 시절.

아마 내가 학교에 입학하던 해였는지 그해는 복숭아 풍년이 들었다. 열려도 너무 많이 열린 것이다. 그래서 그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그만 가지가 부러지고 말았다. 물론 그네를 매단 가지는 아니었지만.

꼭 그것 때문은 아니지만 그 후 얼마 안 되어 우리가족은 고향을 떠나게 되었고 그래서 더 이상 복숭아 그네는 타지 못하게 되었다.

 

그래도 늘 가슴에 남아있던 풍경들 생각하며 그때의 복숭아 맛을 기억하며 자주 사먹곤 하였다.

첫아이를 가졌을 때도 수박과 더불어 유난히 많이 먹어서인지 아이를 낳았는데 참으로 피부가 고왔다. 물론 어린 아이피부가 곱지 않은 아이가 없긴 하지만 성장하면서도 참으로 희고 깨끗하였다.

그러자 시누이가 부러워서 하는 말이 어쩌면 언니나 어진이나 피부가 그렇게 깨끗한지 모르겠다고 하니까 복숭아를 많이 먹어서 복숭아 피부라고 내대신 남편이 대답해 주었다.

정말이지 나는 사춘기에도 여드름 하나 없이 보냈다. 그리고 나는 화장을 거의 안 하는 편이다. 물론 내가 화장 하는 걸 즐기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깨끗한 피부가 화장으로 인해 손상될까 해서이기도 하다. 그래서 지금도 20년 혹은 30년 만에 친구를 만나면 나를 금방 알아본다. 어릴 때 모습 그대로라고.

나를 닮은 아들도 복숭아를 뱃속에서부터 먹고 자라서인지 역시 여드름 없이 자랐다. 지금 청년인데도 역시 희고 깨끗하다.

어제 딸아이가 나와 같이 TV를 보다가 내 다리를 만지면서 이런 말을 하였다.

“엄만 나이답지 않게 피부가 굉장히 깨끗하네! 오빠도 그렇고.”

“복숭아 피부라서 그래.”

 

또다시 복숭아의 계절 여름이 돌아왔다.

복숭아의 달콤한 육즙이 기분 좋게 입 안 가득 맴돈다.

복숭아그네를 밀어주시던 아버지에 대한 강한 그리움과 함께.

 

 

제8회 복숭아 문학상에 응모할 목적으로 쓴 작품이다. 당선되면 실으려 했으나 당락 상관없이 나의 어릴적 이야기이므로 게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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