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사랑

순례 2018. 9. 21. 19:07

아직 그녀가 도착할 시간도 멀었고 마침 전화가 와서 가던길 멈추고 길가에 서서 통화를 하였다
한참 상담에 열중하는데 저 멀리 그녀가 시간에 쫓겨 부리나케 잰걸음을 걷고 있다
직감적으로 그녀임을 감지하고 한쪽 다리로 그녀를 막아세웠다
그녀 역시 막아세우는 나를 한 번 올려다 보고는 나인줄 직감했는지 한쪽에 서서 가쁜 숨을 고르며 내 통화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그녀가 오고도 한참 후에야 통화가 끝났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고 약속 장소인 커피솝 대신 식당으로 향했다

그녀를 직접 만나니 낮고 안정감 있는 목소리와 외모가 흡사 닮아 있었다
점심을 함께 먹고 차를 마시며 얘기하는 동안 호감이 갔다
그녀 역시 나에 대한 호감이 아주 커 보였다
물론 그동안 통화하며 서로에 대해 느낌이 좋았기에 만난 것이긴 하지만
그런데 헤어지려니 어딘가 아쉬워 한다
나역시 노처녀인 그녀를 앞으로 어떻게 대해야할지 조금은 난감하였다
더구나 수심이 가득한 그녀의 표정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지방에서 잠깐 다니러 왔댔으니 아쉬워도 앞으로 볼일은 없겠지

그로부터 3주 정도 지난 어느날 그녀에게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나역시 반가운 마음에 얼른 약속을 잡았다
그녀는 만나자마자 내가 너무 보고싶었다며 나 때문에 상사병까지 났노라 말한다
그런 그녀가 싫지만은 않은데 혹여 내가 스캔들에 시달릴까 한편으로 은근히 우려도 되었다
하지만 그녀는 전혀 나를 곤란하게 할 사람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자기감정에 너무 솔직한 그녀로 인해 내가 좀 당황스럽긴 해도 조금은 촌스럽고 순박해 보였던 만큼 그녀는 순수하였다
그런데 그녀는 이실직고 한다며 지방에 산건 맞지만 오래전에 근교로 이사왔다고 했다
목소리가 멋진 나를 한 번만 만나볼 생각으로 지방에서 볼일 때문에 올라왔다고 거짓말 한건데 만나고 나서 첫눈에 반해 병까지 앓고 나니 다시 보고 싶어 연락을 해온 것이라 했다

그리고 그날 내가 생각했던 노처녀가 아니라 애들이 둘이나 있는 유부녀란걸 알았다
물론 그녀가 나를 속이거나 거짓말 한적은 없다
다만 내가 그렇게 느끼고 판단한거니까
아무튼 그녀는 나와 곤란한 상횡으로 몰아가진 않을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녀는 나의 생일을 물었고 1주일 뒤 내 생일에 다시 만나기로 하였다
나역시 거절 못하고 약속을 하였다
그녀를 배웅하느라 길을 걷는데 팔짱을 낀다
그게 싫지는 않아 뿌리치진 못했지만 누가 볼까봐 조바심을 내며 주위를 살폈다

몇 년전 지방단체장 선거에 출마했다가 낙선하는 바람에 실직자가 된 나를 선배가 도와달라해서 선배 사무실에 나갈 때였다
그러다 우연한 기회에 전화를 통해 그녀를 알게 되었는데 차분한 목소리에 호감을 느꼈다
그렇게 알게된 그녀와 내 생일날 세번째 만났다
그날은 그녀가 하고 싶은 3가지 이야기를 하였다
함께 눈길걷기, 커플반지 끼기, 여행하기
그날 그녀에게 받은 선물은 다른 사람에게 받은거라 아내에게 거짓으로 둘러댔다

그리고 2주쯤 지났을까
갑자기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던 날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그래서 갑자기 약속을 잡았다
덕수궁 돌담길을 걸으면 사랑하는 사람이 헤어진다는 속설 때문에 시청 옆길을 걸었다
그런데 눈이 어찌나 평펑 쏟아지는지 걷잡을 수 없었다
펑펑 쏟아지는 눈길을 함께 우산쓰고 걸으며 이야기 나눌 때는 시간가는줄 몰랐다
하지만 그날 폭설은 곳곳에 교통정체와 교통 마비현상으로 20~30분 거리가 2시간이 넘게 걸리기도 하였는데 그녀는 그나마 거의 제시간에 귀가한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
아마 그녀가 도착할 무렵부터 정체가 더 극심해졌나보다

그녀를 만날수록 나 역시 그녀에게 점점 끌리고 있었다
하지만 난 그녀처럼 내 감정을 다 내어놓지 못한다
그래도 날 만나면서 처음의 어두웠던 수심 가득한 그녀의 표정은 점점 밝아졌다
이대로라면 남들이 뭐라하든 플라토닉 사랑이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았다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녀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 같았다
처음엔 그녀의 적극적인 행동에 다소 당황하기도 했지만 만날수록 때묻지 않고 정말 순수한 여자였기 때문이다

처음에 그녀의 안색이 안 좋은 것은 남편 때문이었다
참으로 가능성도 많고 장점도 많고 무엇보다 심성 고운 그녀가 남편과의 불화때문에 특히 언어소통과 감정소통의 어려움을 호소하였다
그러다 나를 만나며 밝아지고 좋아지는 그녀 모습을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원래 부적절한 관계를 경멸하는 사람이었다
그랬던 내가 나도 모르게 시나브로 그녀에게 빠져들고 있었다
나역시 아내를 지극히 사랑하는 것도 아니고 아내와 살가운 사이도 아니면서 데면데면 살다보니 비슷한 처지의 서로에게 더 애틋하게 끌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입시준비에 한창이던 고3때 갑작스레 내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오랫동안 미국에 사시다 귀국한 이모로부터 내 생모가 따로 있다는 얘길 듣고나서 몇 년 간 방황하였다
나에게 그렇게 극진했던 어머니가 내 친모가 아니란 사실이 큰 충격이었다
그로 인해 몇 년 방황끝에 K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정실부인 즉 나를 키워주신 어머니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독자인 아버지의 대가 끊길까 염려하여 할머니가 소실을 들였는데 딸 하나 낳고 서너살 무렵에 나가버렸다
그분이 나보다 아홉살 많은 누님의 생모다
그리고 몇 년 후 할머니의 강요에 의해 다시 소실을 들여 낳은 아들이 바로 나다
그런데 내 생모는 나를 낳고 하루만에 세상을 뜨셨단다

난 고3이 되도록 내 출생에 대해 전혀 눈치채지 못할만큼 어머니는 나에게 지극정성이셨다
슬하에 자녀하나 낳지 못하고 소실의 자식을 둘이나 당신 손으로 키우셨다
그래서인지 아버진 평생 교직에 몸담고 있으면서도 교육감까지 가지 못하고 교장으로 은퇴를 하셨다
그리고 난 뒤늦게 대학 진학하여 대학동기이자 같은 동아리 활동하던 여학생을 친구이자 처남과 맺어주었다
그리고 처남댁이 시누이이자 친구동생을 소개하였는데 그게 지금의 아내다

그러다보니 여자에게 관심갖거나 연애할 겨를도 없었다
적어도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면 난 아마도 사랑여부를 떠나 한눈 안팔고 착실한 모범가장으로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를 만나다보니 한 번에 풍덩 빠진 그녀에 비해 난 언제든 제자리로 돌아갈 준비를 하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녀의 섹시한 매력에 나도 모르게 점점 빠져들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욕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런 와중에 학점은행제 평생대학에 입학하였다
OT날 불참하고 나와 저녁식사 하면서 와인 한잔 하였다
취기가 살짝 돌자 그녀가 왜그리 예쁘게 보이던지 나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잡아끌고 사람의 발길이 뜸한 곳에서 뜨겁게 키스를 하였다
그녀 역시 기다렸다는 듯 이런 돌발적인 나의 행동을 흔쾌히 받아주었다
혹시라도 나에게 첫눈에 반한 그녀가 내 가정을 깨면 어쩌나 하는 우려도 그 순간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 이후 우린 자연스럽게 한몸이 되었고 관계는 전보다 더 돈독해졌다
그리고 그녀가 하고싶어하는 커플링도 하였다
그녀는 항상 착용했지만 나는 거의 보관만 하다 그녀를 만날 때만 하였다
만나면 5분 10분 지난 것 같은데 어느새 2~3시간이 훌쩍 지난다
만나기만 하면 왜그리 시간이 빨리 지나가는지 쏜살 같다는 말을 매번 실감한다
그때마다 시간이 멈추었으면 바래지만 더 빨리 지나는 시간에 늘 아쉬움만 더할 뿐이다
그리고 기차타고 여행도 하였다
비록 당일로 다녀온 짧은 시간이었지만 같이 들길 강길도 걷고 공원도 걸으며 행복한 시간도 보냈다

그렇게 한창 사이가 무르익을무렵 난 아이들 교육문제로 가족들과 독일에 사는 누님을 방문하였다
몇 년 전 선거에 낙선하면서 집을 날리고 직장도 그렇다보니 아이들을 누님의 양자로 입양시킬 계획이었다

내가 졸업후 대기업에 입사하여 지방에서 연수받을 때 아내를 만나 결혼하였는데 남편도 없는 서울에서 홀시아버지 (어머니는 졸업 전에 돌아가심) 못 모신다는 바람에 같이 살기 위해 퇴사를 하고 서울에서 다른 직장을 구해 다녔다
아내는 나와 함께 살면서도 아버지를 아주 많이 불편해 하였다
아버지 진지상을 차려도 방에 상만 비쭉 들여놓고 나왔다가 다 드시면 치운다
한 번도 밥상에 마주앉은 적이 없고 한 번도 다정하게 말 한마디 건네는 법이 없다

그렇게 한 공간에 살면세 말도 안 하는 아내와 십 수 년을 살다 그녀를 만나다보니 진작 인연이 되어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 더했다
더구나 그녀는 집성촌에서 자라 어른공경의 기본을 알고 매사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남편과 사이가 안 좋으면서도 심지어 부부싸움을 하더라도 밥상은 꼭 챙긴다했다
내 아내는 고학력임에도 불구하고 아예 직장 다녀본 적도 없이 집에 있으면서 내 아침상은커녕 출근할 때 내다보지도 않는 아내를 보며 그녀에게 더 끌릴 수밖에 없었다

아무튼 큰 아들이 중학교 갈 무렵 우리나라 사교육이 심각한 현실과 당시 우리집 상황이 아이들 교육에 어려움이 있는 관계로 누님을 뵈러 간 것이다
누님은 그 옛날 간호사로 독일에 갔는데 독일 영주권자로 공무원이시다

독일은 입양이 아주 까다롭다
누님 혼자라면 입양이 거절될텐데 다행히 좋은사람 만나 결혼하게 되었다
그래서 상견례도 하고 결혼식도 참석하고 두 아들 입양까지 마치느라 두 달 가량 체류하였는데 그 두 달이 왜그리 길기만 하던지
그때 그녀가 간절히 그립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우리의 관계를 정리할 기회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막상 귀국하니 그녀가 견딜 수 없이 보고싶었다
그녀도 내가 없는 동안 나와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하지만 나의 연락을 기다렸다는 듯 단숨에 달려왔다
우린 결국 헤어지지 못하고 갈 때까지 가기로 하였다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그녀의 졸업식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방인이어서 가 볼 수가 없었다
그저 마음속으로 축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가랑비에 옷젖듯 서서히 그녀에게 빠져들기 시작하였다
그녀를 만나면서 우리가 진작 처녀 총각 때 만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을 수없이 하였다
그랬다면 내 인생도 많이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그녀를 만날 때마다 들었다

그녀를 만날 때마다 시간은 왜그리 빨리 지나가는지 할 수만 있다면 언제나 시간을 잡아두고 싶은 아쉬운 마음뿐이다
내가 왜 그렇게 그녀에게 빠져들까 생각해보니 사진으로만 본 내 생모와 이미지가 비슷하였다
거기다 늘 당당하고 끊임없이 자기개발에 힘쓰며 무엇보다 아주 형편없는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면서도 매사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안쓰러우면서도 대견해서인지 모르겠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갔다
언제부턴가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아내에게 연락이 오곤 하였다
나에 대해 둔감한 아내가 어떻게 나의 행적을 눈치챘을까 내가 무슨 꼬투리 잡힐 일을 했을까 싶어 물었더니 작고하신 장모님이 당신 고명딸 꿈에 나타나 나에게 여자가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단다
그 이후 사람을 시켜 미행하고 내게 전화해서 함께 있음을 확인한 것이다

나는 그런것도 까맣게 모른 채 그녀가 보고플 때마다 찾다보니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아내에게 덜미 잡힌 것이다
그리고 그일로 그녀에게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걱정돼 몰래 연락하다 발각된 이후 그녀 연락처를 차단당했다
아내는 내가 한번만 더 그녀에게 연락하거나 만나는 날에 학교와 군에 찾아가 그녀의 두 아들에게 그녀와 나와의 스캔들을 다 털어놓는다며 협박하였다
아울러 남편에게도 얘기한다는 으름장에 차마 더는 연락을 할 수 없었다
그녀 남편이 알았다간 이혼이나 괴롭힘 전에 살인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내게서 더이상 연락이 없자 어느날 그녀가 전화를 하였는데 차단번호라 통화는 못해도 남아있는 표시를 확인하자 아내는 평생 써오던 내 번호를 아예 바꾸어 버렸다
내생애 진정 마음을 다하여 사랑한 그녀를 지키기 위해 그저 잠잠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다만 다음생에라도 부부의 연으로 만날 수 있다면 이생에 못다한 사랑을 다하리라